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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x세니카, 현대물]

 

 

 

 

「생일 축하한다, 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도 모른 채 멍하니 창 밖 만을 보고 있던 게 오늘 하루의 대부분이었다. 퇴근길 버스에서 잠시 들여다본 핸드폰에는 카신이 보낸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에 들어가기 전 빵집에 들러 조그마한 케이크를 하나 샀다. 오늘은 10월 10일, 너와 나의 생일이다.

 

3년 전, 불의의 사고로 너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전혀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주변의 상황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언제나 나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환하게 웃으며 나를 깨워주던 네가 없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가끔 함께 영화를 볼 때면 옆에서 포근하게 안아주던 네가 없다. 잠자리에 들기 전 매일같이 사랑한다며 나지막이 속삭이던 네가 더 이상은 없다. 이 모든 것이 정말로 너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아 장례식장에서는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네가 없는 3년간 나는 반쯤 미쳐 있었다. 매일을 울고 소리도 지르다가 결국은 허탈해하며 잠드는 게 하루의 전부였다. 보다 못한 지인들의 권유로 그만두었던 일도 최근 들어 다시 시작한 것이었다.

 

삑, 삑, 삑, 삑.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거칠게 외투를 벗어 던졌다. 퇴근 후 집에 들어오자마자 티비부터 켜는 습관이 생겼다. 정적만이 흐르는 집안이 너무나도 싫은 까닭이었다.

 

조용히 상자에서 케이크를 꺼내 조각 내고는 접시에 담아 가져왔다. 언젠가 기념할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내가 사오던 딸기 생크림 케이크였다. 원래 단 것을 잘 즐기지 않는 너였지만 이것만은 부드럽고 적당히 달콤하여 마음에 든다며 고집했다. 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것이었는데. 이젠 마주앉아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 너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잠시나마 온기가 들어찼던 가슴에는 또다시 찬바람이 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원체 돌지 않던 입맛이 한순간에 떨어졌다. 두어 번 먹었나 싶은 케이크를 옆으로 밀어 놓고는 티비로 시선을 돌렸다.

 

-제길.

 

하필이면 네가 좋아하던 공포영화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 주말이면 꼭 너와 영화를 봤다. 놀라는 나의 모습이 귀엽다며 공포영화를 섭렵하고 다니던 너였다.

 

짧게 욕을 읊조렸다. 오늘따라 왜이리 너를 추억하게 하는 것이 많은지. 티비마저 끄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반달보다는 찼지만 보름달에는 못 미치는 달이 떠있었다. 날이 흐려 그런지 윤곽만 흐릿하게 보였다. 가만히 눈을 감고 이대로 영원히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백 번은 더 생각했다.

 

딩동. 그렇게 20분 정도 지났나,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집에 찾아올 사람이 있나 의문이 드는 것도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 받았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밀려왔다.

 

누구세요, 묻는 말도 없이 거칠게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카신이 서있었다.

 

-너 이 자식, 또 이렇게 폐인같이 있을 줄 알았다.

-...뭔 상관이야.

 

다짜고짜 찾아와 안부 인사도 없이 욕지거리부터 늘어놓은 카신은 망설임 없이 들어와 집 안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작년이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르게 중얼거리고는 식탁 위에 놓여있던 케이크 박스에 시선을 고정했다.

 

-먹지도 않을 거, 뭐 하러 사 왔어?

 

먹었어, 라며 내가 대꾸하자

 

-먹긴 개뿔. 기껏해야 한두 번 잘라먹고 말았겠지. 너 세니카 생각나서 못 먹을 거잖아. 저거 봐.

 

카신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내가 아까 테이블 한 구석으로 미뤄두었던 케이크 접시였다.

 

-이제 그만 좀 해라. 벌써 3년이야. 너 이렇게 사는 거 세니카가 알면 너 아마 맞아죽을거다.

 

이제 그만 하라니, 듣는 사람은 생각이나 하고 말하는 걸까. 내가 너를, 네가 나를 어떻게 사랑했는데, 세니카.

 

-지금 뭐라고 했냐? 벌써 3년? 너한텐 고작 3년이었나 봐. 나는 그 3년 동안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는데.

 

살기를 담은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표정 하나 깜짝 하지 않은 채 카신이 말했다.

 

-알지, 아주 잘 알지. 내가 그걸 어떻게 몰라. 너희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서로를 얼마나 아꼈는지 어릴 적부터 봐왔는데. 아니까 말하는 거야. 안쓰러워서 그래. 너 이러는 거 세니카는 알아? 걔가 알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그래, 그렇겠지. 내가 이러는 걸 네가 알면 좋아할 리가 없지. 그래도 세니카, 너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의지가 생기질 않는걸.

 

-프시히도 노리도 네 걱정 많이 해. 이젠 기운 좀 차리란 말이야.

 

아무런 대답이 없자, 카신은 작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됐다. 이거 전해주러 왔어.

 

카신의 손에는 조그마한 펭귄 인형이 달린 열쇠 고리가 걸려 있었다.

 

-세니카가 너 주려던 거야. 세니카 죽던 날, 회사 점심시간에 밥 먹고 들어가는 길에 길거리에서 사더라. 너 닮았다면서. 자리에 놓고 간 걸 내가 챙겨서 가져다주려는데 퇴근길에 사고가 났다잖냐. 장례식장에서 너한테 주려는데 어디 말이나 붙일 수 있어야지.

 

-이걸 왜 이제야 줘?

 

-3년 동안은 네가 내 연락 다 씹었고 말이야.

 

아, 그랬지. 지난 3년 동안 나는 카신과 노리, 프시히를 포함한 주변 모두의 연락을 무시한 채 살아왔다. 애초에 인간관계에 큰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라 지인이라 할 사람들 이라고는 전 직장의 동료 정도 였지만.

 

너는 끝까지 정말 내 생각뿐 이었구나. 눈물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카신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 싫어 옷소매로 모른 척 눈가를 훔쳤다. 그런 나를 본 카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손에 열쇠 고리를 쥐어줄 뿐이었다.

 

-이거 전해줬으니까 난 이제 간다.

 

나가는 카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손 안의 열쇠 고리만 만지작거렸다.

 

-정말 너는, 정말로 너는...

 

어떻게 막아볼 새도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눈물이 흐릿하게 시야를 가리는 와중에도 네가 죽던 그날, 내게 주려고 샀다던 열쇠 고리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나를 닮았다니...

 

3년 동안 살고 싶다는 의욕 따위 조금도 들지 않았지만 너를 잊는 게 무서워 죽지도 못했어. 내가 죽으면 너를 기억하는 나마저 사라져 없어지는 거니까. 그래도 세니카, 나 방금 조금이나마 확신이 들었어. 너는 끝까지 내 생각만 했는데 내가 이러고 사는 거 알면 얼마나 한심해 하겠어. 그러니까, 살아볼게. 너를 기억하기 위해서 살아볼게. 얼마나 사람답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번 살아볼게. 밥도 제때 챙겨먹고 잠도 제시간에 들어 제시간에 일어날게. 이렇게 폐인처럼 구는 거 그만두고 이제 일어설게.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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